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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연.전시.축제/인천도시역사관

'인천도시역사관' 2부 [근대 인천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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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인천 도시 역사관의 시작점이자 근대 인천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곳.

인천은 개항을 계기로 근대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시대에 따라 물질. 정신적 변화를 거듭하며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근대도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인천은 과거의 모습이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미래의 길을 제시합니다. [출처:인천도시역사관]

근대 인천의 역사를 보러 입장합시다~

'화도진도'

화도진도는 1879년 7월 1일 설치된 화도진과 8개의 소속 포대, 연안 수로망 등의 방어시설을 그린 관방지도이다.

화도진은 인천을 개항시키려 했던 일본의 요구를 저지하고,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 연안의 방비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개항장의 경찰업무를 수행하다가 1894년 군제 개편으로 혁파되었다.

'해문방수비'

1866년 병인양요가 끝난 뒤 조선 정부가 강화도 덕진진에 세운 비석으로, 덕진진이 위치한 곳은 바다에서 서울로 향하는 수로의 초입에 해당한다. 이곳을 무단으로 통과하는 외국 선박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항장의 관공서'

조선 정부는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는 물품의 관세를 징수하기 위해 해관을 설치하고, 해관의 관리. 감독과 개항장의 질서 유지, 외국인의 출입국 사무를 관장하는 감리를 신설하였다. 감리의 역할은 처음에 통상 사무로 국한했으나, 인천부사가 감리를 겸직하면서 인천부의 행정 사무와 개항장의 통상업부를 총괄하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감리서 담장 안으로 관립 인천항 외국어학교와 인천부공립소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개항장 재판소, 경찰서가 설립되었다. 감리서 주변으로는 화폐를 찍어 내던 전환국을 비롯해서 체신 업무를 담당했던 우체사와 전보사, 그리고 국영 해운회사였던 이운사, 국립 대한천일은행이 들어섰다.

'인천항의 조선인'

제물포에 외국 선박이 정박하면서 개항장에는 부두 노동자와 무역 중개업에 종사하는 상인들, 즉 객주가 모여들었다. 이들의 상점과 가옥은 대개 조계지와 인접한 내동과 신포동에 몰려 있었고, 점차 답동과 경동, 용동 등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객주들은 일본과 청국 상인에 대응하기 위해 조합을 결성했고, 이를 모태로 1897년 신상 회사를 창립했다. 1899년에는 조선인 자본가 정치국의 대한협동기선회사가 해운업과 창고업을 시작하면서 일본 회사가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조선인 선교를 위해서 답동에 천주교 성당이, 내동에는 감리교회와 성공회 성당이 들어섰고, 각각 박문학교, 영화학교, 성누가병원 등 부설 학교와 병원을 두고 조선인에게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통신사 전화과 임명장' 1904년

손기학을 통신사 전화과 주사로 임명하는 궁내부 문서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궁내부에 통신사를 두고 전화과와 철도과를 신설하였다. 인천에는 1898년 처음으로 인천항 감리서와 덕수궁 간의 전화가 개통되었으며, 1902년에는 서울과 인천의 시외 전화업무를 개시하여 일반인도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경인선 기차'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운행했던 모갈형 탱크 기관차이다. 이 기관차는 일본 경인철도 주식회사가 미국 브룩스 사에서 수입한 것으로 부품단위로 들여와, 인천에서 조립했다고 한다. 개통 당시 경인선에는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차 28량으로 운영되었다.

'인천역' 1907년

1907년 당시의 인천역 전경이다. 인천역 건물과 플랫폼 일부를 살필 수 있으며, 역 앞의 도로를 가로지르는 줄을 잡고 있는 조선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 여학교' 1900년 초

영화 여학교는 1892년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부인이 설립한 여성 교육기관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인천 최초의 교육기관이었다. 1900년 내리교회 신축공사로 교회 뒤편 한옥을 임시교사로 사용하다가 1903년 경동에 신축건물을 지어 이전했고, 1910년 지금의 창영동 자리로 다시 옮겼다. 이 사진은 1900년 임시교사로 사용하던 내리교회 뒤편의 한옥 건물 앞에서 교사와 학생들을 촬영한 것이다.

'솔표 석유 상자'  근대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철제 석유통을 담던 나무상자이다. 1897년 미국의 타운센트 상회는 인천월미도에 석유 저장소를 설치하고,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석유 독점 판매권을 획득하였다. 스탠다드 석유는 솔표, 승리표라는 상표를 붙이고 조선에서 판매되었다.

'공화춘 간판' 1910년대

공화춘은 산동성 출신의 화상 우희광이 선린동에 문을 연 중화요릿집이다. 1900년대 초 인천으로 이주한 우희광은 처음 숙식업소인 산동회관을 개업하였으나, 1913년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이라는 뜻인 '공화춘'으로 개명하였다.

'인천 우편국 배달증명서'  1907년

'쌀의 도시, 인천'

인천항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경기도 일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의 수출항으로 기능해 왔다.

그런 탓에 곡물 선물 시장인 미두취인소가 설립되었고, 일찍부터 곡물을 위탁 판매하는 미곡상이 모여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설립한 대형 정미 공장도 속속 들어섰는데 인천항에 집산되는 쌀을 도정하여 백미로 수출하기 위한 공장들이었다. 정미공장과 함께 쌀을 원료로 했던 양조 공장도 인천 곳곳에 문을 열었다.

'율목동 일본인 공동묘지'

개항 후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증가하면서 이곳에서 사망하는 이들이 생겨나, 그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국가별로 만들어졌다. 처음 사동과 답동 일대에 조성되었던 일본인 공동묘지는 그 부지가 협소하여 늘어나는 사망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일본거류민단에서는 1903년 율목동에 3,1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공동묘지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율목동 공동묘지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인천에서 사망했던 일본인이 묻혔으며, 한때 500 여기가 넘는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광복 후 무덤의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남아있던 무덤들은 부평 가족공원으로 이장되었다.

1. 월미도 

월미도 유원지 개발을 위하여 1922년 인천역 서쪽에서 월미도 동쪽 해안까지 약 1km의 석축제방인 돌제를 쌓았다. 월미도를 찾는 행락객이 늘어나자 1937년 돌제를 확장하였다.

2. 조탕

1922년 지하 1층, 지상 2층의 목조로 지어진 건물로 해수를 사용한 남녀 대욕장과 매점이 있었고, 대휴게실,식당 등을 두었다. 본관 1층에서 베란다로 이어지는 해수풀장에서 여름철 목욕과 함께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3. 조탕해수욕장

4. 공설해수욕장

1919년 월미도 동남쪽 해안에 조성된 공설 해수욕장으로 조탕 및 임해학교 전용 해수욕장과는 달리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5. 임해학교

1923년 월미산 중턱에 여름철 청소년들의 건강증진과 심신단련을 위해 설립된 여름학교이다. 매년 여름방학 기간 개교하여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 소학교 학생들이 입교하였다.

6. 월미도호텔

1923년 월미도 유원지를 인수한 월미유원주식회사의 사옥 겸 호텔이다. 영업 실적이 부실하여 사장의 저택으로 사용하던 중 1933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7. 조탕호텔

월미도를 찾는 행락객이 많아지자 1928년 조탕 맞은편에 신축한 3층 규모의 호텔이다. 1층과 2층에 객실과 사무실을 설치하고 3층에는 부속 베란다를 갖춘 다다미방을 두었다.

8. 조탕별관

1934년 신축한 조탕 별관으로 조탕과는 회랑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1층은 대형식당과 오락실, 2층과 3층은 빈 호텔로 사용되었다.

9. 삼백첩누각

월미도의 동북쪽 조탕호텔의 옆에 위치한 건물로 대형연회잔으로 사용되었다.

10. 용궁각

1937년 조탕 서북쪽 바다 위에 세워진 연회장이다. 바다에 콘크리트 교각을 놓고 그 위에 일본식 목조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조탕과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바닷물이 들어오는 만조 때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11. 해항검역소

1910년 만주지방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조선총독부는 1911년 검역소를 설치하였다.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서 들어오는 선박과 사람들은 이곳에서 검역절차를 마쳐야만 인천항에 입항할 수 있었다.

12. 스탠다드 석유회사 창고

타운센드는 1895년 스탠다드 오일회사와 계약을 맺고 조선에서의 석유 판매 독점권을 획득하였다. 1896년 월미도 동쪽 해안에 약 60만 통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짓고, '솔표'라는 상호로 석유를 독점 판매하였다.

13. 소월미도 등대

1903년 6월 1일 팔미도 등대와 함께 소월미도에 세워진 등대이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7일 미군의 상륙에 앞서 일본인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14. 애탕신사

월미도 정상에 있던 신사로 1908년에 설립되었다. 일본 교토에 위치한 애탕산 정상에 위치한 애탕신사의 분사이다.

헉헉헉... 쪼~~ 기 왼쪽 끝 전시실로

이동해야 합니다.

쫌만 쉬었다가 갈게요~~^^;;

2부 끝!!

3부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인천 연수동해물나라&13첩산해진미밥상을 경험해보세요.

오늘은 KBS.SBS.MBC 3사 방송된 연수동해물나라에서 홈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해서 배달시켜 먹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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