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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연.전시.축제/인천도시역사관

🏛'인천도시역사관' 3부🚋 [인천의 발전 과정을 담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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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로 돌아왔습니다!

 

 

 

 

 

3부 시작해 봅시다!!

 

쭈~~ 욱 직진해서 걸어가 봅시다!

 

 

 

 

 

도시의 번영, 도시민의 삶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설치된 전기, 수도, 항만 등의 기반시설, 일본인 자본가들에 의해 세워진 대규모 산업시설 등은 인천을 화려한 근대도시로 치장하는 선전도구가 되었다.

일본은 이러한 인천의 번영을 식민통치의 치족으로 삼아 조선인은 물론 국제적으로 널리 선전하고자 했다.

1915년 한일병합 5주년 기념해서 개최한 조선물산 공진회의 별관으로 '인천 수족관'을 개관했으며, 일본 학생들이 꼭 가봐야 할 수학여행지로 인천을 추천하기도 했다.

도시의 발전은 윤택한 도시민의 삶으로 이어져 극장, 해수욕장, 유원지 등 인천 부민을 위한 위락시설도 들어섰다.

그러나 도시 번영의 혜택은 대부분 일본인들에게 돌아갔으며, 인천 부민 중 다수를 차지하던 조선인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인천항의 이중 갑문식 선거'

 

조선총독부는 인천항의 최대 약점인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하여 1911년 6월 이중 갑문식 선거 건설공사에 들어가 1918년 10월 1차 준공을 보고, 1923년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중 갑문식 선거는 배가 정박하는 선거의 수심을 8~10m로 일정하게 유지하고, 선거와 바다 사이에 두 개의 갑문을 설치하여, 갑문 사이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조수와 관계없이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항만 시설이었다.

선거 내에는 4,500톤 급 선박 세척과 2,000톤 급 선박 다섯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었고, 부두에서 인천역으로 이러지는 철로를 부설하여 하역과 동시에 육상 운송을 가능하게 했다.

일본은 이를 '동양 유일의 이중갑문식 선거'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일본에 이어 이중갑 문식 선거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자, 그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선전도구였다.

 

 

 

 

 

'조선은행 인천지점'

 

조선은행은 1878년 부산에 설립된 일본 국립 제1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처음 문을 열었다.

인천의 관세 취급권을 장악하고 일본 상인들의 이권을 지원하려는 목적이었다. 1888년에 인천출장소를 인천지점으로 승격하고 서울의 출장소를 두었다.

제1은행은 통상적인 은행업무 외에도 관세, 조선 금괴 및 사금의 매입, 은행권 발행 등의 업무까지 대행하여 실질적인 중앙은행의 기능을 하다가 1909년 통감부에서 설치한 한국은행으로 흡수되었다.

1911년 총독부에서 조선은행법을 제정하면서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천우체국'

 

1884년 조선 정부는 우편제도의 도입을 위해 우정총국을 설립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업무가 중단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한성과 인천을 오가는 우편업무가 재개되면서 인천에도 우체사를 설치하였다. 1898년부터 갑오개혁으로 한성과 인천을 오가는 우편업무가 재개되면서 인천에도 우체사를 설치하였다. 1898년부터 우편업무가 전국으로 확대되었지만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통신기관을 장악하였고, 인천 우체사를 일본영사관 인근의 인천우체국으로 통합하였다. 인천 우편국은 1923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의양풍 건물'

 

의양풍 건물은 서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목조 건물로 외벽은 목조 비늘판으로 마감하고 지붕에는 일본식 기와를 올려놓았다.

의양풍은 일본에서 1870년대까지 크게 유행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1900년대 초까지 인천 일본조계에 위치한 관청, 상점, 가옥 등의 건물에 활용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의양풍 건물로 인천 측후소, 인천경찰서, 인천우체국, 인천 유치원, 조선신보사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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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공회당'

 

1814년 부제 실시와 함께 각국의 조계가 폐지됨에 따라 인천에 살고 있던 인천 일본거류민단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재 중구청 인근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소는 공회당으로 용도를 바꾸었고,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시설,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1923년 인천 공회당을 홍예문 부근에 신축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이전했다.

이 건물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남쪽 중앙의 현관에는 인천 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홍예문 길에 면한 건물 좌측으로 또 다른 문을 내어 인천상공회의소의 입구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인천 공회당에서는 개항 50주년 기념 축하회, 인천 주류 품평회, 인천시민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광복 후 한국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고, 1957년 그 자리에 시민관이 들어섰다. 건물 개보수 후 지금은 인성여고에서 다목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홍예문'

 

러. 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조선인 거주지였던 만석동, 송월동, 전동까지 확장하게 된다. 새로운 거주지로의 이동과 철도 이용을 위해 축현역(현 동인천역)을 가려면 해안지대를 돌거나 응봉산 고개를 넘어야 하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1903년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는 응봉산을 관통하는 터널공사를 착공하였다. 화강암과 벽돌을 혼용하여 축조한 홍예문은 도로 폭 4.3m, 높이 10m, 통과 길이 9.3m 규모로 1908년 완공되었다.

 

 

 

 

 

'조선인 교육'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의 교육정책을 운용하 면사 조선인과 일본인의 교육 과정과 내용에 차등을 두었다. 조선인의 교육은 초등교육과 기초적인 실업교육,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인이 초등교육을 받았던 기관은 보통학교였는데 인천 공립 보통학교(현 창영초), 인천송림 보통학교(현 송림초), 부천 공립 보통학교(현 문학초)등은 인천에서 조선인들이 다니던 대표적인 학교였다.

인천 공립 상업학교(현 인천고)에서는 실업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본인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은 야학과 강습소에서 교육에 대한 열망을 채웠다.

그러나 당시 공교육의 목표는 식민지배에 충실한 '국민'의 양성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쟁 물자를 생산했던 군수공장'

 

중일전쟁 이후 인천의 산업구조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을 생사 하는 중화학공업 위주로 변해갔다.

1937년 [인천시가지 계획]에 따라 구획된 학익동과 용현동 일대에는 조선중앙 전기, 히타치제작소, 군용 페인트를 생산했던 경성 화학공업 등이 들어섰으며, 만석동 매립지에는 조선 기계제작소, 도쿄 시바우라 전기, 일본 차량 제작소, 조선 이연 금속회사 등의 공장이 건설되었다.

1940년 [경인 시가지 계획]으로 인천부에 편입된 부평지역에는 차량용 강판을 제작했던 경성 공작소를 비롯해서 히로나카 상공, 디젤 자동차, 국산 자동차공업 등 차량 및 기계공장이 들어섰다.

한편 도쿄에 본부를 두고 전쟁무기의 생산을 담당했던 일본 육군 조병창은 부평역 일대 36만 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인천 조병 차을 건설 했다.

직접 무기를 생산했던 조병창을 비롯해서 각종 군수 공장이 밀집해 있던 인천은 일본이 일으킨 세계대전을 수행하는 명실상부한 군수 도시가 되었다. 

 

 

 

 

 

'쌀과 소금의 철도, 수인선'

 

1930년 11월 경동 철도 주식회사는 여주와 수원을 잇는 협궤철도 수여선을 개총 했다.

여주, 이천 등 경기 내륙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수원까지 운반하고, 이를 다시 경부철도로 부산까지 실어 나른 뒤, 부산항을 통해 일 번 본토로 반출하기 위해서였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일본은 1937년 7월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연장하는 수인선을 개통했다.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될 경우 중국에서 가까운 인천항을 경유하는 것이 군수 미의 운송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인선은 공사기간과 공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레일 사이의 폭이 좁은 협궤철도로 건설되었으며, 인천항에 종착역을 두어 운송되는 군수 미를 선박에 그대로 선적할 수 있었다.

한편, 수인선은 남동, 소래, 군자 염전 등 인천 연안의 염전 지대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을 한반도 전역으로 운송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청나라 짐승 모양 대포'

 

일본 육군 인천 조병창에서 무기 제조를 위해 중국으로부터 공출해 온 철제 대포이다.

상단의 명문으로 보아 중국 함풍제(1851~1861) 때 허난 성 개봉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본은 조선은 물론 중국 전역에서 금속류들을 인천 조병창으로 실어와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생산했다.

 

 

 

 

 

1943년 일본 육군은 동남아 전장의 지원을 위한 수송용 잠수함 건조 계획을 발표한다.

잠수함 건조를 의뢰받은 조선 기계제작소는 광복 때까지 모두 네 척의 잠수함을 육군에 인계한다.

 

 

 

 

 

인천 경정(현 경동) 제1정회의 주민들이 놋그릇을 비롯한 각종 쇠붙이 헌납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이다.

현수막에는 '영국과 미국을 격멸하자' '치고야 말리라'라는 선전문구가 적혀있다. 헌납된 물품마다 이름이 붙어 있으며, 우측 동상에는 '응소송본청옹'이라고 쓰여 있다.

송 본청은 인천의 대표적인 친일파 김윤복의 일본식 이름이다.

 

 

 

 

 

수인선 협궤 선로 부속품(1930년대)

 

 

 

 

 

1907년 화재감시를 위해 자유공원에 설치한 소방용 망루와 사이렌 탑이다. 1906년 2월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대포가 각국 공원에 설치되었다.

매일 정오에 포를 쏘았다 하여 '오포'라 했는데 1931년부터는 소방용 망루에 설치되었던 사이렌으로 대체되었다.

전시체제로 돌입한 1940년부터는 매주 월요일 오전 7시 사이렌 소리에 맞춰 궁성요배를 하고, 정오에는 묵도와 신사 참배를 해야만 했다.

사이렌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 통제를 위해 사용된 억압과 구속의 상징이라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번화가를 가득 메운 수많은 군중들이 만세를 외치면서 일본인의 거리로 행진하였다.

'진센'이라 불려 왔던 도시는 '인천'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일본어 간판이 가득했던 식민 도시에서 우리의 도시로 변하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휴~~ 다 관람하고 나가야 하는데

나가기가 싫다

 

영트기 배고파서 나간다!!!

 

 

 

인천 연수동해물나라&13첩산해진미밥상을 경험해보세요.

오늘은 KBS.SBS.MBC 3사 방송된 연수동해물나라에서 홈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해서 배달시켜 먹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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