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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공연.전시.축제/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3전시실 - 가야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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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낙동강 서쪽의 변한 지역에 있었던 여러세력의 집단이 성장한 나라로, 가야.가라.가량.가락.임나등 명칭이 다양합니다. 가야영역은 오늘날의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역이 중심이며, 빠른시기의 영역은 낙동강 동쪽일부 지역까지입니다. 가야는 백제.신라와 패권을 다투었지만, 고령의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562년)되면서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출처-국립김해박물관안내서)

변한12국 - 소가야. 비화가야.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3전시실 내부

3전시실 내부

뚜껑없는 긴목항아리.그릇받침

금동관 (보물 제1922호) / 가야의 금동관은 화려한 신라의 금관과는 달리 단순한 나뭇가지모양입니다. '산'자 모양의 신라금관 초기형태처럼 보이는데 , 금못으로 관테와 세움장식을 고정시키는 제작기법은 유사합니다. 하지만 신라처럼 금관은 없고 금동관만 알려져 있습니다. 부산 동래 복천동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얇은 관테의 가장자리에 물결무늬와 점무늬를 결합시켜 장식하였고, 세움장식에 3줄의 곁가지가 뻗어 있으며, 1~2줄의 달개(금관따위에 매달아 반짝거리도록 한 얇은 쇠붙이 장식)를 달아 장식미를 더하였습니다.

팔 찌

청동검에서 바뀐 날카로운 철검은 실용적인 무기지만, 손잡이 끝에 둥근고리를 달고 그 안에 용이나 봉황으로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리자루칼이라 부르며, 금.은을 사용하여 다양한 무늬로 꾸몄기 때문에 장식대도라고도 합니다. 가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에서도 신분.권위의 상징물입니다. 미늘쇠는 길쭉한 철판의 가장자리에 가시모양의 미늘이 달린 철제품입니다. 그런데 합천 옥전.함안 말이산고분군 등 일부지역의 큰 무덤에서는 새모양의 미늘이 달린 큰 미늘쇠가 출토됩니다. 이것은 묻힌 이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고, 새모양 토기와 함께 새를 숭배했던 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줍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에서는 5세기 이후 다양한 지역색을 띤 토기가 나타납니다.김해 윗덕정.죽곡리.화정.안양리유적에서는 금관가야 토기뿐만 아니라 대가야.소가야.아라가야토기 및 신라토기가 혼재되어 나타납니다. 이 시기까지 금관가야가 존재하였지만, 그세력이 예전 같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김해 윗덕정유적은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형성되었고, 화정유적에서도 신라식 돌방무덤이나 제사를 지낸 구덩이가 발견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한 이후 6세기에서 7세기전반 사이에 만들어진 김해지역 지배자들의 무덤일 것입니다. 김해지역에서 여러 지역의 가야토기와 신라토기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신라로 넘어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신라 문물이 들어오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역의 가야는 고구려의 남정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6세기 대 이후 신라의 본격적인 팽창 정책으로 창녕 지역이 먼저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그 뒤 금관가야 멸망(532년), 대가야 멸망(562년)을 끝으로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 대성동유적에서도 5세기 초엽이 되면 큰 무덤의 축조가 중단됩니다. 점차 신라식 돌방무덤과 신라토기인 짧은 굽다리접시로 바뀝니다. 가야의 여러지역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토기나 장신구도 신라 지방 문화의 하나로 바뀌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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