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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공연.전시.축제/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6전시실 - 철의왕국,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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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은 청동보다 단단하고 예리하기 때문에 실용성이 큰 재질입니다.

우리나라 서북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에서 중국 연나라(B.C 323~222년) 화폐인 명도전과 철제품이 출토되어 이 시기에 철기문화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의 성장기반은 '철'이었고, 철의 보급은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철은 화폐처럼 사용되었으며, 특히 덩이쇠는 정량화.규격화되어 교역의 매개물로 사용되었다. (출처-국립김해박물관)

 

 

 

 

 

 

 

가야의 성장 기반은 '철' 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철생산과 철제품의 보급은 사회를 변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철은 청동보다 단단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기때문에 실용성이 큰 재질입니다

 

 

 

'쇠로 만든 칼로 가야를 지키다'

 

 

가야는 풍부한 철 생산지와 유리한 교역 환경때문에, 주변나라의 표적이 되어 자주 전쟁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수많은 전쟁 기록과 일치합니다. 잦은 전쟁탓에 여러 가지 종류의 무기를 개발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칼.창.화살 등이 있습니다. 철제 무기류는 살상 능력이나 관통력 증가, 신호를 알리는 기능 등 다양한 기능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무기는 전쟁에도 사용하지만, 용,봉황을 장식한 큰 칼이나 매우 긴 창등은 교류나 신분과시에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철제무기의 종류와 양으로 피장자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목을 보호하는 갑옷, 목가리개

 

 

 

사람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쇠갑옷입니다.

세로로 긴 철판을 못 또는 가죽 끈을 이용해서 부채모양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철판은 좁아지고 철판 수가 많아집니다.

처음에는 갑옷에 붙여서 만들어졌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움직임을 편하게 하기위해 따로 분리하여 입는 모양이 되었습니다.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싸우다'

 

갑옷은 전투에서 칼이나 화살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위해 철로 만든 옷입니다. 처음에는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었으며, 철을 다루는 기술의 발달로 철갑옷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은 철판의 형태에 따라 판갑옷과 비늘 갑옷으로 나눕니다. 철판을 못이나 가죽끈으로 연결하여 완성합니다.

 

 

 

 

갑옷은 사람의 몸에 맞게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우수한 기술력이 필요하였습니다.

새나 고사리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은 주로 영남 지역에서 확인됩니다.

지금 남아있는 갑옷무게는 약 4~5kg 정도이지만, 철이 녹슬기 전에는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세로로 길게 자른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합니다.

투구 윗부분을 깃털로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투구의 종류는 세로로 긴 철판을 엮어 만든 것에 반원모양의 복발을 얹은 투구, 앞쪽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투구, 모자 앞에 챙을 단 투구, 관모모양의 복발을 붙인 투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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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화살을 쏘다'

 

활쏘기와 관련된 것으로 활과 화살, 화살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무기의 나무나 가죽은 잘 남아있지 않으며, 드문 경우지만 활이나 화살대가 발견되어 그 형태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화살은 신호, 살상, 화공 등 기능에 맞게 다양한 화살촉을 만들었습니다. 화살촉은 무덤에서 화살통에 담겨진 채로 발견되기도 합니다.

 

 

 

 

 

화살통은 가죽이나 나무로 만듭니다. 겉면에 무늬를 넣은 후 옻칠하거나 화살통 가장자리와 화살통을 메는 끈의 부속품으로 금.은.금동제품을 사용합니다.

화살통의 형태를 복원함으로써 메는 방법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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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고 싸우는 사람들'

 

말은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길들인 동물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타거나 짐을 나르거나, 신속한 이동과 정보 전달을 위한 치열한 전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빠른속도로 달리는 말을 제어하거나 안전하게 타기 위해 여러가지 기능을 가진 말갖춤을 만들었습니다.

먼저 달리는 말을 조종하기 위해 입에 재갈을 물려 고삐와 연결하였고, 누구나 편하게 말을 탈 수있게 안장과 발걸이를 만들었습니다.

말을 탄 사람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방울 등으로 말을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가야의 말갖춤은 김해 대성동, 양동리유적에서 4세기 대의 재갈과 발걸이가 나타나고, 5세기 대에 장식용 말갖춤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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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련로의 구조'

 

고대 제련로는 그릇을 엎어놓은 형태로 추정합니다.

노벽은 높은 온도와 압력을 견디기 위해 대나무 등으로 골격을 세우고 진흙.모래.짚을 섞어 벽체를 만든 후 점토를 보강합니다.

제련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송풍으로, 제련로 내의 온도 유지 및 연료 소모와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송풍장치는 나무상자 풀무와 가죽주머니이며, 송풍장치와 노 내부를 연결하는 송풍관이 있습니다.

 

 

 

 

'쇠를 부리는 가야 사람들'

 

김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야는 곧'철'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철 생산과 철제품의 보급은 사회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었으며, 무덤에서 나오는 수 많은 철제품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고성 조개더미,부산 복천동.밀양 사촌이나 임천리유적에서 확인한 철 생산유구와 집게.모룻돌.망치 등의 단야구의 존재로 보아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기술과 다양한 철제품을 만드는 주조.단조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출토된 망치는 1세기 무렵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서'

 

가야와 주변나라가 교류하는 데 일등공신은 '철'이었고, 물건만 서로 주고받는 단계에서 벗어나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교류로 바뀌어 갔습니다.

김해 대성동.양동리유적에서 출토된 중국.일본 물건과 로만글라스 파란색 유리조각은 금관가야의 다양한 국제성을 보여줍니다. 5세기 대에는 대가야지역에서 챙 달린 투구등 일본계 금속제품, 합천 옥전무덤에서 서역과 관련된 유리잔, 고령지산동유적에서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도 발견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가야 토기, 덩이쇠등 가야계 유물이 확인되며, 스에끼라는 일본식 도질토기와 이전에 없던 다양한 철제품을 유행시켰습니다.

5세기 대 이후 일본 규슈에서 긴키지역까지 대가야계 금동관이나 금귀걸이, 금.은제 말갖춤이 발견되었습니다.

 

 

 

'말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달렸다'

 

철갑옷은 사람뿐만아니라 전사가 탄 말도 입었습니다.

말갑옷은 사람처럼 얼굴을 가리는 투구와 몸을 가리는 갑옷으로 구분됩니다. 말갑옷은 철판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목가리개는 부채꼴모양으로 연결하였습니다.

말갑옷과 중무장한 무사의 모습은 고구려 벽화무덤이나 말 탄 사람모습의 토기에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실물자료는 함안 마갑총(말갑옷이 확인된 무덤이라 붙여진 이름)을 비롯한 함안 일원.부산 복천동.고령 지산동.합천 옥전.경주 황남동 등 대부분 영남 지역에서 나타납니다.

함안 마갑총은 대형 덧널무덤(석곽묘;길이6.9m, 너비2.8m)으로 최초로 가야 말갑옷이 발견된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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